시계가 녹아내릴 때
영감

시계가 녹아내릴 때

3분 소요

그는 치즈를 보고 있었다. 포트 리가트의 절벽도, 멍든 수평선도, 무의식의 거대한 극장도 아닌, 그저 따스한 부엌에서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 한 접시를. 그러다 문득, 가장 진솔한 생각들이 그렇듯 옆구리를 찌르듯 아이디어가 스며들었다. 시계도 저렇게 녹아내린다면 어떨까?

그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면 초현실주의는 보이지 않게 된다. 기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변은 제 형태를 지키고 있다. 호박색 바위, 고요한 물, 그리고 더는 당신의 것이 아닌 듯한 방의 그 특유한 푸른빛과 황금빛 사이에 걸린 하늘.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고, 지질학적이며, 끈기 있다. 그런데 시계들이다. 하나는 죽은 나뭇가지에 걸쳐져, 문장 중간에 잠들어버린 사람처럼 얼굴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탁자 모서리에 널려, 아무런 다급함도 저항도 없이 땅을 향해 스며 나오고 있다. 세 번째는 모래 위에 누운 부드럽고 물컹한 생명체의 등 위에서, 잠든 것인지 녹아내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마치 일 년의 슬픔이 들러붙어 마침내 몸과 하나가 되듯 그것에 매달려 있다. 유일하게 닫혀 있는 시계, 여전히 단단하고 확실한 유일한 시계는 개미 떼에 뒤덮여 있다. 살아있는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혹은 부드러움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고 싶어 한다.

공기에서는 따뜻한 돌과 너무 익어버린 과일 냄새가 난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평생을 시간은 자처럼 곧고 뻣뻣한 것이라 믿는 척하며 살아가지만, 우리가 품은 모든 진솔한 기억은 시간이 물과 같다고 말해준다. 어떤 곳에서는 고이고, 다른 곳에서는 세차게 흘러가며, 손에 담아보기도 전에 증발해버리는 그런 물 말이다.

당신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림에서가 아니라,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이제껏 그 앞에 서 있었던 모든 세월의 무게를 온전히 느껴보았기에. 4분 만에 끝나고 앞으로의 10년을 통째로 뒤바꾼 전화 한 통을 받아보았기에. 어느 화요일 오후, 벽에 깃든 어떤 빛 때문에 문득 여섯 살인 동시에 예순 살이 되었지만, 벽시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계속 움직이던 그 순간을 겪어보았기에.

달리가 이 감각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그는 치즈가 녹아내리도록 내버려 두고 그 생각이 이끄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갔다. 측정의 도구들만이 제 형태를 지키지 못하는 풍경 속으로. 세상은 굳건히 서 있다. 시계들이 항복한다.

거기에는 어떤 허락과 비슷한 것이 있다. 정해진 시간표를 불신해도 좋다는 허락. 시간을 전혀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몇 계절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는 순간들을 귀히 여겨도 좋다는 허락. 당신이 품고 있는 시간의 모습, 즉 울퉁불퉁하고, 떠나간 이들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끌려가는 그 시간의 모습은 왜곡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가진 가장 정확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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