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말에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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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말에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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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품고 사는 질문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죽음과 상실, 모든 것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순간에 대해 너무나 자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를 끊임없이 맴도는 또 다른 종류의 문턱이 있다. 바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다. 과거의 나라는 보호막 같던 물속에서 걸어 나와, 앞으로 되어갈 나의 모습으로 떨며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바로 그 찰나.

저기, 거대한 가리비 껍데기 위에 서 있는 그녀를 보라. 한 손은 가슴을 가리기 위해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러모으고 있다. 1485년경 피렌체에서 그려진 산드로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은 그 어떤 거울도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포착한다. 키프로스 해안에 도착한 미의 여신뿐만 아니라, ‘되어감’이라는 보편적인 순간 그 자체를 말이다. 그녀는 분명 신성을 지녔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지만, 또한 몸을 가릴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녀는 방금 바다의 거품과 재앙, 폭력과 변신 속에서 태어나, 이제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5세기도 더 지난 이 그림이 왜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걸까? 아마도 우리는 저 자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해안가에 서서,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다음에 올 일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거품이 기억하는 것

A close-up view of a chicken egg hatching in straw, highlighting new life emerging.Photo by Myriams Fotos on Pexels

그림 뒤에 숨은 이야기는 보티첼리가 팔레트 위에서 섞었던 물감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너스, 즉 아프로디테는 평범한 방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그 신성한 유해를 바다에 던졌을 때 생긴 바다 거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폭력에서 아름다움이 나왔다. 파괴에서 사랑 그 자체가 태어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종종 잊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은 결코 온화한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명은 스스로 존재의 길을 찢고 나온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위대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이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렸다. 그것은 혁명적인 행위였다. 거의 천 년 동안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몸은 수치심과 경건함 속에 가려져 있었다. 누드는 죄악이었고,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고대 그리스를 돌아보며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그는 육체가 신성할 수 있음을 보았다. 아름다움 자체가 기도의 한 형태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는 캔버스에 에그 템페라 기법으로 작업하며, 얇고 투명한 색의 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비너스가 마치 내면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의 피부는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광채를 품고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원작 앞에 서 보아야만 한다. 그녀는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빛을 만들어낸다.

비너스를 둘러싼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왼쪽에서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마도 클로리스나 아우라일 님프와 엉켜 그녀를 해안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뒤얽혀, 하나의 추진력을 형성한다. 그녀의 오른쪽에서는 계절의 여신 호라 중 하나가 꽃무늬 망토를 들고 기다린다. 그녀는 비너스를 맞이하고, 옷을 입히고, 그녀가 원소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넘어오는 과정을 돕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비너스 자신은 홀로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은 그 사이의 공간이다. 바람은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고, 해안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정지된 순간 동안, 그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순수한 잠재력 그 자체이며, 껍데기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균형을 잡은 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학자들은 보티첼리의 의도가 고전적 아름다움의 이상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르네상스가 학문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경이로움의 부활임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여신은 물질세계에 도달한 영혼을 상징하며, 시간과 쇠락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도 신성한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그것은 그림으로 구현된 철학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이 철학보다 더 오래된 무언가, 우리가 뼛속까지 느끼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던 해안들

Close-up of a woman using a hairdryer to style her long red hair indoors.Photo by Beyzanur K. on Pexels

당신이 경험했던 탄생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문자 그대로의 출생뿐만 아니라, 그것들 역시 포함해서 말이다. 처음으로 새 학교에 걸어 들어갔던 순간, 끝없이 펼쳐진 복도, 낯선 얼굴들뿐이던 그 순간을.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는 직장에서의 첫날, 화장실을 찾는 것조차 시험처럼 느껴졌던 그날을. 이혼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이전에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누군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던 그 순간을.

우리는 한 번의 생에서 수없이 많이 태어난다. 그리고 각각의 탄생은 저마다의 공포와 바람,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해안을 품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아침이 기억난다. 내 경력의 다음 단계를 결정지을 발표를 앞두고 건물 밖에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코트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는 터무니없게도 비너스를 떠올렸다. 그 자세, 몸을 가릴 무언가를 찾는 그 손길을.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알던 물속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은 이미 나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고, 문가에서는 누군가 비유적인 망토를 들고 내가 그 문을 통과하도록 도우려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과소평가한다. 우리는 ‘용감하다’는 말을 군인이나 소방관을 위해 아껴두면서, 모든 인간이 급진적인 노출의 순간과 마주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십 대. 홀로 처음으로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미망인.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예술가. 진단을 받고 이제 그 새로운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환자.

비너스가 몸을 가리는 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과 연약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녀는 숨는 것이 아니다. 준비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또 다른 해안

Close-up of a nest with three speckled eggs surrounded by greenery in a natural setting.Photo by Serhat Gezer on Pexels

그렇다면 관광객들과 그들의 카메라에 둘러싸여 우피치 미술관에 서 있는 보티첼리의 여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세상에 나오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하나의 자세다. 삶은 우리의 옛 자아를 계속해서 벗겨낼 것이다. 우리는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직업, 관계, 정체성을 잃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변해버린 몸으로, 우리가 잠든 사이 변모해버린 나라에서, 죽음이나 거리로 인해 재구성된 가족 안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매번, 우리는 어떤 해안가에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누군가 망토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면서.

이 그림이 주는 선물은 그 아름다움이 아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압도적이다. 이 그림의 선물은 ‘되어감’의 본질에 대한 정직함이다. 비너스는 해변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외부의 힘에 실려 도착한다. 자력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온전히 현존하며, 온전히 신성하며, 온전히 자기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이 취약하지 않은 척하지 않는다. 자신감을 꾸며내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도착하고, 그 도착으로써 해안 자체를 신성한 땅으로 변화시킨다.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지혜가 여기에 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 옷을 갖춰 입지 않아도 괜찮다. 저편에서 어떤 사람이 될지 아직 몰라도 괜찮다. 당신은 그저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바람이 당신을 실어 나르도록 내버려 두라. 해안에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들고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라.

거품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비너스는 앞을, 육지를, 세상을, 그리고 다음에 올 모든 것을 향해 있다.

어쩌면 질문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만큼 용감한가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은 우리가 기꺼이 그곳에, 물과 해안 사이의 그 공간에, 과거의 우리도 아니고 미래의 우리가 될 모습도 아닌, 그저 무섭도록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로, 단 한순간이라도 서 있으려 하는가 하는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