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월요일 오후, 폭탄이 떨어지고
영감

어느 월요일 오후, 폭탄이 떨어지고

3분 소요

그 순간

창문 너머로 몸을 기울여 램프를 든 여인이 있다. 그녀는 그림 밖 또 다른 공간, 아마도 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고 세상은 아직 불가능한 각도와 절규하는 입들로 조각나지 않은 혼돈 너머의 어떤 방에서부터 그림 속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 그녀를 둘러싼 거대한 어둠에 비하면, 그녀의 램프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다. 머리 위 벌거벗은 전구는 차갑고 무감각하게 타오르지만, 그녀의 불꽃은 다르다. 더 따스하고, 더 인간적이며, 더 연약하다.

그녀의 아래에서는 말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팔다리가 잘린 병사는 잔해 속에 누워 있다. 부러진 칼은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고, 산산조각 난 손바닥에서는 한 송이 꽃이 자라나고 있다. 모든 것이 흑과 백, 그리고 잿빛의 색조로 그려져 있다.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일 앞에서 색채마저 살아남지 못한 것처럼. 인물들은 각지고 기하학적이며, 현실보다는 악몽의 논리에 따라 재조립되어 있다. 몸들은 제 안으로 포개어지고,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눈이 나타난다. 공간은 무너져 내리고, 안과 밖이 뒤바뀌며, 이런 고통과 저런 고통 사이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램프를 들고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녀의 모습은 승리에 차 있지도, 자신의 작은 불꽃이 이 광활한 고통의 장을 밝히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그 불꽃을 내민다. 한때 마을이 있었고, 어느 월요일 오후 사람들이 시장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그 조각난 공간 속으로. 피카소는 그곳에 그녀를, 이 목격자 혹은 희망, 혹은 어둠에 온전히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소박하고 완고한 몸짓을 그려 넣었다.


성찰

우리는 이제 너무나 많은 참상을 스크롤하며 지나친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휴가 때 어디를 갔는지 같은 평범하고 즐거운 소식들 사이에, 그 참상들은 우리의 휴대폰으로 배달된다. 다른 선택지, 즉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비극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것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슬픔 아래 무너져 내리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은살을, 우리에게 필요한 무감각을 기른다. 그리고 계속 나아간다.

하지만 램프를 든 그 여인은 내 안에 머문다. 그녀가 무언가를 해결해서도 아니고, 그녀의 빛이 어둠을 밝히기에 충분해서도 아니다. 그녀가 머무는 이유는, 이해하거나 바로잡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어려운 무언가를 우리에게 묻기 때문이다. 그녀는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꽃을 계속 내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들로부터 가지고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답도, 해결책도 아닌, 완전히 외면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고통을 멈출 수는 없을 때조차 지켜보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깨달음. 우리의 작은 빛들이 보아야 할 것들의 지극히 일부만을 비출 때조차, 그 빛을 어둠 속으로 내미는 일이 어떻게든 필요하다는 앎.

그녀는 창문 너머로 몸을 기울여, 그 부족한 램프를 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복잡한 현재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은 불꽃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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