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차고 어두웠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는 손으로 들고 있는 램프의 위태로운 불빛만이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지난 2년간 그는 단 하나의 갈망 속에서 살아왔다. 그것은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불가능의 문턱을 넘는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제, 그 문턱을 넘어섰다. 그것이 숨을 쉰다. 흐리멍덩한 노란 눈이 뜨인다. 초점 없이 축축하고 무언가를 찾는, 세상의 모든 새로운 눈이 그러하듯, 익숙한 무언가를, 자신이 어떤 세상에 떨어졌는지 알려줄 얼굴을 찾고 있었다.
빅터는 달아난다.
그는 문 앞에서 멈칫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가로질러 옆방으로 쓰러지듯 들어가 동이 틀 때까지 뜬눈으로 누워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으레 그렇듯, 아침이 되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없던 일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피조물은 창조주가 잠들어 있던 방으로 들어선다. 그것은 손을 뻗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피조물이 훗날, 수년간 조용히 갈고닦은 유창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직접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대 위 커튼을 걷어낸다. 그것은 노란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본다. 어쩌면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빅터는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 비에 흠뻑 젖을 때까지 잉골슈타트의 거리를 헤맨다. 그 광란의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피조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가 그것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그것이 추워하고 있는지.
자신이 겪은 일을 표현할 단어 하나 배우기도 전에, 유기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책임 없는 창조는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폭발이다.
셸리의 소설 속 잔해는, 그 뒷걸음치는 하나의 형상으로부터 끔찍하고도 집요한 논리를 따라 바깥으로 퍼져나간다. 모든 죽음, 모든 필사적인 분노의 행동, 뻗은 손 앞에서 닫혀버린 모든 문, 이 모든 것의 근원은 한 방에 머무르지 못했던 한 남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도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이 빚어낸 것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우리가 이 장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 대부분은 훔친 신체 조각으로 피조물을 조립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 감각을 안다. 돌봄이 어느새 의존이 되어버린 관계, 원래의 규모를 훌쩍 넘어선 프로젝트,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우리가 연습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이. 그리고 문 쪽으로 향하는 그 이끌림을 느낀다. 자유인 척 위장하는 탈진. 현실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혐오감.
셸리는 머무르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혹은 모든 창조물이 무한한 헌신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위안을 주기에는 너무나 정직하다. 그녀가 노란 눈이 열리는 순간과 멀어지는 발소리 사이의 공간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일이 끝났기에 떠나는 것과 당신이 만든 것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떠나는 것의 차이다.
피조물은 고개를 들었다.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