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이 품은 기억
영감

별들이 품은 기억

3분 소요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라. 유명한 그림의 테두리를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땅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검은 불꽃, 저 불가능해 보이는 하늘을 향해 몸부림치며 휘감아 올라가는 모습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 이 나무들은 우리가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위엄 있는 정적 속에 서 있지 않다. 나무들은 몸을 뒤틀고, 손을 뻗는다. 마치 땅과 하늘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나무와 별과 잠든 마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친 해류에 휩쓸린 것처럼 저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나선을 고스란히 비춘다.

반 고흐는 신경 쇠약으로 스스로 들어간 정신 병원의 병실에서, 낮 시간에, 기억에 의존해 이 그림을 그렸다. 그가 포착한 밤은 창밖의 밤이 아니라 그의 가슴속에 있던 밤이었다. 격동하고, 쉬지 못하며, 결코 잠잠해지기를 거부하는 밤. 소용돌이치는 우주를 향해 안간힘을 쓰는 저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사로잡는 것은 그 솔직함이다. 그 나무들은 평온한 척하지 않는다. 자신의 강렬함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는다. 그저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손을 뻗을 뿐이다.

교회의 첨탑도 마찬가지다. 위를 향해 뻗은 하나의 검은 손가락은 땅과 별들 사이의 간극을 결코 메우지 못한다. 이 거리감,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을 향한 이 영원한 갈망에는 무언가 목이 메는 구석이 있다. 반 고흐는 자신이 무너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이 자신을 미쳤다고 본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격동을 캔버스에 쏟아부었고, 그것을 100년 넘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무언가로 변모시켰다. 폭풍을 숨김으로써가 아니라, 그 끔찍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내면의 격동이 다른 이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찰까 두려워하며, 세상에 평온한 겉모습을 보이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강렬함에 대해 사과한다. 우리는 더 안정된 영혼들을 위해 지어진 공간에 자신을 맞추려 스스로 빛을 흐린다. 하지만 저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잊고 있는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폭풍과 아름다움은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들은 같은 에너지이며, 우리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우리를 관통해 흐르는 동일한 생명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우리가 안정적인 척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어떨까? 만약 온 세상이 내내 움직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저 알아채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을 뿐임을 인정한다면 어떨까? 반 고흐가 그린 밤은 평화롭지 않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 밤은 더 기묘하고 더 영속적인 무언가를 건넨다. 아름다움에는 완벽한 조건이 필요 없다는 주장, 가장 심오한 환상은 때로 가장 무너진 곳에서 나타난다는 고집을.

저 뒤틀린 풍경 위에서 별들은 무심하고 영원하게 계속해서 타오른다.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 우리가 우리만의 것이라 주장하는 어떤 작은 방에서, 우리는 위를 올려다보며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향한 오래된 이끌림을 느낀다. 이 그림은 이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 혼자만은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전체 글을 읽어보세요.

전체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