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던지는 질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엽서 속 가을 풍경처럼, 위엄 있는 붉은빛과 황금빛 잎사귀들이 그림같이 땅으로 흩날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이후의 풍경이다.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들, 한때는 풍성하고 생명력 넘쳤으나 이제는 가장 본질적인 형태만 남은 존재의 헐벗은 골격. 우리는 겨울에 그런 나무들로부터 시선을 피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에는 이 특별한 벌거벗음을 일컫는 단어가 있다. 나목(裸木). 벌거벗은 나무. 그 이름에는 어떤 수치심도 없이, 오직 관조만이 담겨 있다. 박완서 작가는 1970년 자신의 데뷔 소설 제목으로 이 이미지를 선택했고, 『나목』을 통해 수십 년을 넘어 울려 퍼지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 삶을 규정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벗겨져 나갔을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소설은 작가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은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수백만 명의 다른 이들처럼 그녀 역시 한때 미래라 불렸던 것의 폐허 위에 서게 했다. 그녀가 끔찍이 아꼈던 오빠는 살아남지 못했다. 스스로 그려왔던 삶은 분단된 조국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스무 살이었고,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벌거벗은 나무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고, 품었던 꿈이 산산조각 나고, 믿었던 세상이 상상 이상으로 연약한 곳임이 드러났을 때, 그 차가운 상실의 바람 속에 서서 ‘이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 본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나무는 당신이 살아남을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묻는다.
초상화가와 폐허
『나목』에서 우리는 전쟁 후 서울이라는 낯선 풍경을 헤쳐 나가는 젊은 여성, 이경을 만난다. 그녀는 미군 PX에서 고향에 보낼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군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판다. 자신의 조국을 막 폐허로 만든 외국 군대의 군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파는 그녀의 처지는 깊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그녀는 조국의 의존과 굴욕을 상징하는 바로 그 남자들을 잘생기게, 온전한 모습으로 그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면에 산산조각 난 자기 세상의 날카로운 파편들을 품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바로 그런 곳에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녹여냈다. 그녀 또한 슬픔으로 마음이 여전히 헤집어진 채, 붓을 손에 들고 미군들 앞에 서서 그들에게 예쁜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치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 생존의 부조리함을 관망할 수 있는 기묘한 관점 같은 것이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해서 먹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돈이나, 잠잘 곳이나, 일상적인 노동이 주는 소소한 존엄이 필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삶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고집한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경은 극적인 좌절을 겪은 뒤 의기양양하게 회복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복수, 혹은 정치적 각성에서 구원을 찾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계속 살아갈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고, 일터로 가고, 낯선 이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 변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바라보는 행위, 그들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행위가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박완서는 전쟁이 끝나고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이 이야기를 썼다. 마침내 그 단어들을 종이 위에 옮겼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명확히 보기 위한 그만한 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폐허 속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고, 어머니가 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지나온 젊은 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벌거벗은 나무는 새로운 잎을 틔우고, 또 수많은 겨울을 지나며 그 잎들을 거듭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내에는 지혜가 담겨 있다. 우리는 종종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구름이 채 걷히기도 전에 희망의 빛을 보고 싶어 하고, 교훈을 당장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때로 이해는 회고 속에서만 찾아온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의 형태를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거리를 갖게 되었을 때 말이다.
계속해 나아가는 기술
나 역시 자신만의 겨울을 견뎌낸 사람들을 생각한다. 20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몇 달간 유령처럼 하루하루를 떠돌다, 자신이 서서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친구.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의고 6주 뒤,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책상에 앉아 분기 보고서에 관한 이메일에 답장하던 동료. 자식을 먼저 묻고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매년 봄이면 이제야 내가 이해하게 된 어떤 맹렬함으로 정원을 가꾸었던 나의 할머니.
우리는 잊음으로써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 붙잡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무언가를, 그리고 또 다른 작은 것을,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찾아냄으로써 살아남는다. 그러다 어느 날 고개를 들어보면, 우리가 그 파편들로 하나의 삶을 일구어냈음을 깨닫게 된다.박완서의 소설 속 초상화 작업은 바로 이 진실을 담고 있다. 이경은 자신을 온전하게 그려낼 수 없다. 오빠를 그림으로 되살리거나 유년 시절의 조국을 복원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물감을 섞을 수 있다. 낯선 이의 얼굴 윤곽을 연구할 수 있다. 자신의 손이 캔버스에 닿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은 초월이 아니다. 그보다 더 소박하고 어쩌면 더 정직한 그 무엇, 즉 생존의 일상성이며, 마침내 하나의 삶이 되는 순간들의 조용한 축적이다.
내가 알기로 상실을 가장 우아하게 헤쳐 나가는 사람들은 거창한 회복의 몸짓을 보이는 이들이 거의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저녁을 차린다. 대화가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무언가를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몸이 공간 속에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산책을 한다. 그들은 살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새 준비된 마음이 그들을 따라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벌거벗은 나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무는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다. 긍정적인 생각의 힘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드러나고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서서, 이전의 수많은 계절을 견디게 해주었던 그 과정을 신뢰할 뿐이다. 뿌리는 깊이 내리고, 가지는 찾을 수 있는 모든 빛을 향해 뻗어 나간다. 그리고 온기가 돌아오면 다시 꽃을 피운다. 헐벗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헐벗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벗어내는 과정은 극복해야 할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환의 일부였다.
겨울이 드러내는 것들
봄만을 갈망해서는 놓치기 쉬운, 벌거벗은 나무만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골격이 눈에 보이게 된다. 보통은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본질적인 구조가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난다. 가지가 부러졌다가 아문 자리를 볼 수 있다. 그 가지들의 패턴 속에서 성장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숨겨진 것도, 꾸며낸 것도 없다.
박완서 작가가 소설 제목을 『나목』이라 붙인 것은 이 드러남이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자유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우리이게끔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장식들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마침내 그 모든 것 아래에 무엇이 있었는지 보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몰랐던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때로는 수년간 덮어두었던 상처, 이제 공기와 빛이 닿아 마침내 아물기 시작할 수 있는 상처를 발견하기도 한다.
고통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인생의 겨울은 정말로 춥다. 상실은 실재하며, 고통스럽고, 그 어떤 철학도 그 아픔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고통과 절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고통은 우리가 빼앗긴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절망은 그 어떤 것도 다시는 자라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벌거벗은 나무는 절망에 맞서는 증거로서 서 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상실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혹은 언젠가 우리가 겪은 고통에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해마다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끝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기다림이기도 하다는 것을, 얼어붙은 땅 아래에서 뿌리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질문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은 무엇이 가능해지느냐일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무엇을 이제는 볼 수 있는가? 우리가 짊어졌던 무게에서 벗어나, 무엇을 향해 손 뻗을 수 있는가? 이 삭막하고 정직한 땅에서 어떤 새로운 성장이 움틀 수 있는가?
겨울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이 계속되는 동안, 벌거벗은 나무는 그 헐벗은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서 있다. 숨기지도, 꾸미지도 않은 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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