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먼 자가 들은 것
영감

귀 먼 자가 들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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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5월 7일, 빈. 한 남자가 천여 명의 관객을 등지고 서 있다. 그의 팔은 거대한 무언가의 마지막 진동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폭발 같은 환호가 터져 나오기 전의 정적을 그는 들을 수 없다. 금박을 입힌 벽을 타고 오르는 함성, 발 구르는 소리, 작은 흰 새처럼 공중으로 던져지는 프로그램들, 바로 그 폭발 자체를 그는 들을 수 없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는, 그의 마지막 몇 년간 늘 그래왔듯 오직 내면만이 존재할 뿐이다. 상상 속의 소리. 현실의 불완전한 음향에 더럽혀지지 않은 채, 음악이 온전하게 살아 숨 쉬는 그만의 성전.

그는 가슴을 들먹이며 오케스트라를 향해 서 있다. 등 뒤의 극장 전체가 기립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때 한 손길이, 그가 들을 수 없는 공기 속으로 그의 음표들을 노래했던 콘트랄토 캐롤라인 웅거의 손길이, 그의 팔에 닿는다. 부드럽게.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만지듯.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고 돌린다. 너무나 작고도 너무나 거대한 각도로, 그가 마침내 관객을 마주할 때까지. 벌어진 수많은 입. 어둠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손. 무언가가 평범한 갑옷을 꿰뚫고 들어왔을 때 얼굴이 드러내는 그 무방비한 표정들.

그는 그것을 본다. 자신의 음악이 이 낯선 이들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단 한 음도 들을 수 없지만, 어떤 일을 했는지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무언가를 만드는 목적은 사람들의 수용이라고. 반응이라고. 우리가 쏟아부은 것이 실재했고 중요했다는, 외부로부터 도착하는 증거라고. 우리는 그 전환의 순간을 기다린다.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그 증거를 마주하게 될 때를 기다린다.

하지만 베토벤은 밀폐된 방 안에서 9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합창이 휘몰아치는 모든 부분,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하나 되어 인류애의 선언을 외치는 모든 순간,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상상을 더 이상 물리적 세계와 대조하여 확인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만,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존재했다. 그는 침묵 속에서 들은 것이 공기 중에 닿았을 때도 여전히 진실일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만약 그 제약이 그의 비극이 아니라, 기묘하고도 무서운 자유였다면 어떨까. 창작 행위는, 언젠가 그 방의 응답을 듣게 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언제나 완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발견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건넨 가장 진실한 것들이 실제로 상대에게 닿았는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솔직한 말들, 수년간의 조용한 노력, 그리고 우리가 결코 들어가지 못할 어느 방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받을지 모를 누군가를 향한 사랑.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그다음 일어날 일들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박수갈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향곡은 언제나 내면에서 연주되는, 충만하고 누구도 침묵시킬 수 없는,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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