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스러진 뒤, 남겨진 것들
영감

모든 것이 스러진 뒤, 남겨진 것들

3분 소요

그 순간

캔버스 앞에 선 그녀가 손에 붓을 든 채, 또 다른 낯선 이의 얼굴에 쓸 살색 물감을 섞고 있다. 이경은 스무 살, 그녀의 오빠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군 병사들을 그리고 있다. 아직 아들이 있는 어머니들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녀는 그 씁쓸한 아이러니를 모를 리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무엇 하나 희미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문제의 일부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베일 듯이 날카로운 선명함으로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병사는 어렸다. 어쩌면 그녀와 동갑일지도. 제멋대로 솟은 머리카락과 코를 가로지르는 주근깨가 있었다. 그는 잘생겨 보이고 싶어 했다.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강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길 원했다. 두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발음조차 못 하는 나라의 황폐함에 연루되지 않은 모습을. 그래서 그녀는 그를 그렇게 그린다. 그녀는 그에게 다정한 눈매와 곧은 턱선을 그려준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은 캔버스에 담지 않는다. 그 역시 집을 떠나온 나그네이며, 그 역시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으며, 폐허 속에서 또 하루를 버텨내려 애쓰는 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을 때조차, 그녀의 손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이것이 그녀가 슬픔에 대해 배운 것이다. 슬픔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소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면제해주지 않는다는 것. 여전히 쌀 살 돈이 필요하고, 근무 시간이 되면 나타나야 한다. 전쟁은 오빠를 앗아갔지만, 그녀의 허기나 월세, 혹은 잠에서 깨어 잠들 때까지 어떻게든 채워야 하는 시간들까지 앗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린다. 이방인들의 얼굴 굴곡을 살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캔버스에 닿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온전한 치유는 아니지만, 무언가는 된다.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음을 가르쳐준 세상 속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작은 행위 같은 것.


성찰

아무도 우리에게 대비시켜주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생존이 있다. 바로 평범한 삶처럼 보이는 생존이다. 우리는 슬픔이 극적일 것이라, 우리를 무릎 꿇게 하고 시간을 멈출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그렇다. 하지만 더 자주, 슬픔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조차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계속해나가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이메일에 답장하고, 저녁을 차리고, 출근해서 우리가 잃은 것 앞에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들을 해낸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조용히 쌓여 마침내 파편들로부터 재건된 삶이 되는 순간들이다. 일 그 자체가 일종의 증언이 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증언. 우리의 손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공간을 가르며 움직인다. 그리고 작은 행동들의 반복 속 어딘가에서, 우리 자신의 고통 바깥의 것들에 기울이는 관심 속에서, 무언가가 변한다.

어쩌면 우리는 회복을 위한 거창한 몸짓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초상화 한 점을 더 그리고, 밥 한 끼를 더 짓고, 숨 한 번을 더 내쉬기 위해 제자리에 나타남으로써 살아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앙상한 나무는 겨울을 견뎌내기로 결심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계절이 바뀔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또한 할 수 있는 전부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서 있고, 계속 일하고, 계속 지켜보는 것. 그러다 어느 날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가 마침내 이겨냈음을 깨달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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