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 책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먼저 명심해야 할 점이다.
1868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루이자 메이 올콧을 상상해 보라. 부드러운 초점의 사진 속 모습이 아니라,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한 여인도 아니다. 진짜 모습이다. 지쳐 있다. 종이 위에 너무 오래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 어깨가 뻣뻣하다. 손목과 눈 뒤쪽에 스며든 그런 피로다. 그녀는 가명으로 스릴러를 써온 지 수년이 흘렀다. 피와 미스터리가 가득한,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야기들. 그런데 지금은 소녀들을 위한 책을 쓰고 있었다. 가족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정의 생계를 제대로 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했기 때문이다. 펜이 종이 위를 움직인 것은 영감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의무라는 꾸준한 압박 아래서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써낸 글은 공허하지 않았다. 공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삶, 자신의 자매들, 추운 크리스마스와 낡아빠진 겨울들, 세상이 그들을 거의 서로에게만 내버려둔 상황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온기를 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돌에서 귀한 것을 캐내듯, 마르치 가족의 다정함은 신중하게 추출된 것이었다. 힘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점점 부족해져 가는 온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그 베풂의 행위 어딘가에서 진실한 무엇인가가 보존되었다.
부드럽게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냉소주의는 언제나 손쉽다. 용기도, 노출도, 진정한 위험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앨코트는 평범한 삶의 작은 방들을 마치 인간 경험의 온전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다루기로 선택했다. 타버린 저녁밥. 수선한 장갑. 누가 응접실을 쓸지 다투는 자매들의 소리. 그녀는 이런 순간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기를 거부했고, 그것들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다. 마치 자매들을 모방하라는 것도, 가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거나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는 것도 아니다. 더 큰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우리 자신의 일상적 삶의 질감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늦은 밤 형제자매와의 전화 통화. 다른 탭에 여전히 열린 채로 남아 있는 반쯤 끝낸 프로젝트. 고요한 집안에서 나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
앨코트는 자신의 선호와 몸의 한계, 작품에 대한 의심을 거스르며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모든 의심을 뛰어넘어 오래도록 남았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늦은 밤 책상에 앉아, 청구서는 미납되고 설거지는 안 된 채, 자신이 쓰고 싶은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진실된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