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탱하려 우리가 짓는 표정
영감

세상을 지탱하려 우리가 짓는 표정

9분 소요
시간이 부족하신가요? 1-2분 Quick 버전 빠른 읽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고딕 양식의 창문이 하나 달린 하얀 집 앞에 서 있다. 남자는 쇠스랑을 왕의 홀처럼, 어쩌면 무기처럼, 혹은 어쩌면 너무나 오랫동안 들고 다녀 이제는 손의 일부가 되어버린 도구처럼 똑바로 쥐고 있다. 여자는 우리에게서 살짝 비켜난 곳을 응시한다. 그녀의 시선은 우리를 지나쳐 표류한다. 마치 액자 바로 너머의 무언가가, 그녀가 결코 입에 담지 않을 무언가가 그녀의 주의를 끈 듯하다. 그들의 입은 닫혀 있다. 그들의 자세는 꼿꼿하다. 그들의 옷은 소박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침묵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질문은 농사나 아이오와, 혹은 1930년대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꿋꿋이 버티기 위해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미국 미술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 중 하나가 된 그랜트 우드의 1930년 작, 『아메리칸 고딕』의 중심에 자리한 고요한 무게감이다. 우리는 이 그림을 안다고 생각한다. 수천 번 패러디되었고, 억압과 미국 중서부 특유의 뻣뻣함에 대한 농담거리로 전락했으며, 커피 머그잔과 핼러윈 의상에 인쇄되었다. 하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유머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이름 붙이기 더 어려운 무언가다. 결코 움츠러들지 않으리라, 서로 상의 한 번 없이, 마음먹은 두 사람의 모습이다.

그들 뒤의 창문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그 명성보다 더 작고 기이하다. 우드는 아이오와주 엘던을 지나다 소박한 목조 주택에 달린 고딕 부흥 양식의 아치형 창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 주변의 평범한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창문이었다. 그 대비가 그를 매료시켰다. 평평하고 실용적인 농지 한가운데 심어진 웅장함을 향한 몸짓, 거기에는 거의 부조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그 집을 스케치했고, 나중에 그의 누이인 낸 우드 그레이엄과 그의 치과 의사인 바이런 맥키비 박사를 모델로 섭외했다. 두 사람 다 농부가 아니었다. 그 땅에서 일해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스튜디오에서 따로 포즈를 취했고, 우드는 그들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구도 속으로 조립해 넣었다.

이 그림은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해에 세상에 나왔다. 농작물 가격은 폭락했다. 미국 중심부의 작은 마을들에서는 은행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땅을 일궈온 가족들은 자신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우드는 참상의 풍경이 아니라 침착함의 초상을 내놓았다. 그림 속 부부는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살아남는 방법이란 그들 뒤의 집처럼 굳건하고 단호해지는 것이라고 결심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당시 비평가들은 우드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들은 시골 사람들의 편협함에 대한 부드러운 조롱, 즉 풍자를 보았다. 다른 이들은 이 나라를 세운 가치에 대한 진솔한 찬미, 즉 헌사를 보았다. 우드 자신도 수년에 걸쳐 이랬다저랬다 모순된 답변을 내놓았다. 아마도 그 모호함이야말로 핵심일 것이다. 그림은 두 가지 해석을 동시에 품고 있다. 마치 실제 인간의 얼굴이 한결같은 표정 속에 자부심과 고통을 함께 담을 수 있듯이 말이다. 쇠스랑은 도구이자 경계 표시다. 여인의 카메오 브로치는 기념품이자 방패다. 그림의 모든 디테일은 이중의 역할을 하며, 바로 그 이중성이 그림을 생생하게, 단 하나의 해석에도 저항하게 만든다.

우드가 온전히 의도했든 아니든 그가 포착한 것은,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 보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존엄성이었다. 부부는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 자신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침착하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며,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날들의 갑옷

Aerial view of dramatic consequences of massive hurricane with ruined houses and kindling woods lying on green lawnPhoto by Kelly on Pexels

주변에서 정기적으로 마주치는 사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음에도 매일 아침 흐트러짐 없는 차분함으로 출근하는 동료. 자신의 세계가 좁아지고 있음에도 잔디를 잘 관리하고 현관을 깨끗하게 쓰는 이웃.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식탁을 차리는 부모. 그 의식이 바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버텨주는 뼈대이기에 그 의식을 지켜나가는 부모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 틈에서 살아간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극적인 몸짓이 아니라 작고 신중한 행동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특별한 종류의 힘이 있다. 알람을 맞추는 것. 셔츠를 다리는 것. 제자리에 나타나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인다. 심지어 감정을 거부하는 경직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안다. 때로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이란, 삶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평범한 하루의 형태를 그저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고딕』의 인물들은 종종 냉담하고, 억압되었으며, 감정적으로 닫힌 사람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냉담함과 침착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억압은 부정을 의미하지만, 침착함은 선택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삶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게 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누군가 꿋꿋하게 버티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강인함으로 위장한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적 투명성을 중시하고, 종종 취약함을 용기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취약함은 용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 반대, 즉 불투명해지려는 의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 당신의 삶이라는 고딕 창문 앞에 서서 그저 설명하지 않는 것 또한 용기의 한 형태임을 잊곤 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용기다. 계속해서 나아간 사람들의 용기다. 자신의 고통이 실재하기 위해 누군가의 목격이 필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용기다.

그림 속 여인은 우리를 살짝 비껴 바라본다. 그 비스듬한 시선은 거대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녀는 수치심 때문에 우리의 눈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우리의 관찰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내면세계는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목에 걸린 카메오 브로치는 닫혀 있다. 초상화 속의 초상화, 봉인되고 사적인 채로.

쇠스랑이 아는 것

Photo of a tablet displaying a social media app interface with 22 likes, highlighting digital interaction.Photo by Pixabay on Pexels

『아메리칸 고딕』을 문화적 유물에서 거울로 변모시키는 감상법이 있다. 패러디는 잊어라. 커피 머그잔도 잊어라.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어느 화요일 오후 당신의 길모퉁이에 이 두 인물이 막 나타난 것처럼 바라보라.

수직으로 들린 남자의 쇠스랑은 그 뒤의 창문이 지닌 고딕 양식의 선과 공명한다. 우드는 이 시각적 운율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도구와 건축물이 같은 기하학적 언어를 구사하게 했다. 하지만 그 배열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쇠스랑은 위협적으로 치켜들리지도, 기진맥진하여 내려놓지도 않았다. 똑바로 세워져 있다. 쉬고 있지만 준비된 상태다. 그것은 하나의 과업을 마치고 다음 과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는 사람의 자세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인간 삶이 취하는 자세, 그 사이의 자세, 결코 정지가 아니라 응축의 시간인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자세다.

a sign that says don't forget to smilePhoto by Hyeongmin on Unsplash

우리는 생각보다 더 자주 자신을 추스른다. 한 가지 어려움과 그다음 어려움 사이에서, 전화를 받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 전 깊은 숨을 내쉬는 사이에서, 상실을 겪고 그래도 저녁을 차리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 사이에서 말이다. 이러한 사이의 시간은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 인격이 깃든다. 그곳이 바로 퀼트를 하나로 잇는 솔기다.

그랜트 우드는 자신이 살지 않는 집 앞에 서서, 자신의 것이 아닌 옷을 입고,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사람인 척하는 그의 치과 의사와 누이를 그렸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그 겹겹이 쌓인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 그는 사진이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정직한 무언가에 도달했다. 우리가 연기하는 모든 표정 아래에 자리한 그 표정, 즉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버티고 있다. 하루는 길고 일은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 쇠스랑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표정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에 길에서 표정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 자세가 꼿꼿하고 눈빛이 흔들림 없는 사람을 지나치게 된다면, 당신이 그 주에 목격하게 될 가장 비범한 용기의 행위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모든 침착한 얼굴 뒤에는 화려하고 어울리지 않는 고딕 양식의 창문, 평범하고 고된 삶의 한가운데 심어진 아름다움을 향한 작은 몸짓이 존재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라.

남자는 쇠스랑을 똑바로 들고 있다. 여자는 우리를 지나쳐 본다. 하얀 집은 서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마치 참았던 숨이 가득 차 있듯이,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는 모든 것을 품고서, 그 침묵은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