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 속의 침묵
영감

절규 속의 침묵

3분 소요

그 순간

새벽 3시. 어둠 속에서 당신은 깨어 있다. 이름 모를 공포가 가슴을 옥죄어 온다. 곁에는 누군가 잠들어 있다. 숨소리는 고르고, 닿을 수 없이 멀다. 방은 평범하다. 천장에는 늘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복도 저편에서는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내면에서는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것이 바로 1893년 에드바르 뭉크가 그린 순간이다. 비록 그는 그 배경을 오슬로피오르의 한 다리 위로 설정했지만 말이다. 한 인물이 얼어붙은 채 서서, 해골 같은 얼굴에 두 손을 대고, 고뇌에 찬 타원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뒤에서는 두 동행인이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간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 비명은 그들이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 그림의 정직함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세상은 저녁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그림 속 인물은 공포 속에서 완전히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

뭉크는 “자연을 관통하는 무한한 비명”을 느꼈다고 썼다. 자신의 비명이 아니라, 파도처럼 자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더 거대한 어떤 것이었다고. 하늘은 붉고 노란 띠를 이루며 몸부림쳤다. 그 아래의 물결은 그 역겨운 움직임을 그대로 메아리쳤다. 모든 것이 공황의 형태로 뒤틀렸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걸어갈 뿐이었다.

우리는 이 고립감을 안다. 동료들이 사업 전망을 논하는 동안 가슴이 조여 오는 회의 시간. 슬픔이 담즙처럼 역류하는데도 빵을 건네야 하는 가족 저녁 식사. 가장 큰 비명은 종종 우리 몸을 떠나지 못하는 것들이다. 세상은 우리의 고통을 비추기를 거부한다. 형광등은 계속 윙윙거리고, 플레이리스트는 멈추지 않는다.


성찰

뭉크가 이해했던 것, 그의 그림이 1세기가 넘도록 살아남게 한 것은 바로 우리 안에 두 가지 역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는 인물인 동시에, 아무것도 모른 채 걷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한 시간 만에 그 둘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당신은 커피숍에서 누군가의 맞은편에 앉아,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휴대폰을 넘기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을 본다. 하지만 그 평범한 육체 안에서는 거대한 기상 이변이 휘몰아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기억. 서서히 부식되어 가는 결혼 생활.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멈춘 적 없는, 내면을 갉아먹는 부족함이라는 감정. 그 어떤 것도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은 그저 얼굴일 뿐이다.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다. 비명은 인간 존재의 일부이다. 우리가 망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고, 의식이 있으며, 우리 자신의 필멸성을 인지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림은 그다음 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인물은 결국 손을 내릴지도 모른다. 숨을 고르고, 다리를 계속 건너갈지도 모른다. 비명에 누가 응답했기 때문이 아니라, 최악의 감정조차 결국에는 다른 감정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걷던 그 두 사람은 뒤돌아볼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저 곁에서 지켜봐 주며 서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다리를 건너고 있다. 각자의 어두운 강물 위를, 때때로 경고의 색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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