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 잠드는 방
영감

소원이 잠드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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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가 ‘방’의 문턱에 서 있다. 그들은 터널을 기어 통과하고, 고인 물을 건넜으며, 보이지 않는 덫을 시험하려 무게추를 단 천을 허공에 던지기도 했다. 논쟁하고, 쉬고, 또다시 논쟁했다. 그들은 무언가의 종말처럼 보이는 풍경을 가로질러 이 먼 길을 왔다. 녹과 안개, 콘크리트 사이로 자라난 풀, 스스로를 포기한 세상의 아름다운 잔해. 그리고 이제 ‘방’이 바로 코앞이다. 한 걸음. 하나의 문. 하나의 소원.

누구도 들어가지 않는다.

여정이 그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 아니다.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멈춘 것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고요하고 총체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만약 ‘방’이 약속한 것을 이루어준다면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 평생을 관객 앞에서 갈망을 연기해 온 ‘작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소원이 실은 좀스럽다는 것을 의심한다. 그가 광고해 온 그런 갈망과는 전혀 다른, 굶주리고 민망한 작은 욕망. 폭군들이 ‘방’을 사용하게 두느니 차라리 파괴할 각오로 왔던 ‘교수’는 자신의 두 손이 무엇을 향해 뻗을지 믿을 수 없다. 그들은 평생 자신과 의미 사이의 거리를 지도에 그려왔다. 이제 그 거리가 사라지자, 그들은 그 거리가 다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 뒤에서, ‘스토커’는 흐느낀다. 그들이 실패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던 무언가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방’ 그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다가가는 고통을 원한다. 그들은 의미가 자신들보다 한발 앞서 있기를, 손이 살짝 닿지 않는 문으로 남아 있기를, 결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형태를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소원으로 남기를 원한다.


우리는 평생의 대부분을, 스스로 들어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방으로 향하는 정교한 지도를 만드는 데 쓴다.

사실 당신은 ‘작가’와 ‘교수’가 거부했던 그 방을 이미 알고 있다. 당신 역시 그 문턱에 서 본 적이 있다. 승진이 현실이 되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던 순간, 누군가 당신이 몇 년을 기다려온 바로 그 말을 내뱉은 뒤의 침묵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주위를 맴돈 나머지 당신 자신의 회피를 기리는 기념비가 되어버린 창작 활동 속에서. 우리 모두는 검토되지 않은 소원을 품고 산다. 우리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검토된 소원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에게,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의 껍질을 벗겨낸, 우리 욕망의 실제 형태를 온전히 소유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 타르코프스키가 영화의 절망 밑바닥에 숨겨둔 것이 있다. ‘구역’은 결코 저 바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걷지 못하는 한 소녀가 부엌 식탁에 앉아 세 개의 유리잔이 움직일 때까지 응시한다. 기차가 지나간다. 유리잔은 계속 미끄러진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평범하지만, 그 안에서 불가능한 무언가가 어쨌든 일어난다.

의미는 당신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다. 의미는 이미 여기에 있다. 당신의 일상이라는 잔해 속에 흩어져 있고, 평범한 사물들의 떨림 속에 있으며,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이 선택했던 사랑 속에, 아침 햇살이 어떤 표면에 부딪힐 때 아무 이유 없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지는 순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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