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 그 사이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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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 그 사이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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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은 생존의 반대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못했다. 거친 날씨와 더 거친 기대 속에서 수년간 훈련받으며, 우리는 다정함이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자들만의 사치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배리 젠킨스의 2016년 영화 『문라이트』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소리치기보다 속삭이는 방식으로, 그래서 더욱 가슴을 저미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우리 안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어쩌면 가장 강인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푸른빛을 뚫고 닿는 목소리

문라이트는 한 인생의 세 시절, 세 개의 챕터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속삭임보다 커지는 법이 없다. 리틀, 샤이론, 블랙. 소년, 십 대, 그리고 한 남자. 이름은 저마다의 의상이고, 육체는 해결되지 않은 동일한 아픔을 감싸기 위해 지어진 요새다. 영화의 목소리는 교훈적이지 않다. ‘여기, 마이애미 리버티 시티에서 흑인 소년이 자라는 방식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저 아이가 보이나요? 곁에 머물러 줄 수 있나요?‘에 가까운 말을 건넨다.

무거운 손과 더 무거운 양심을 지닌 마약상 후안은, 작고 말없는 아이에게 바다에 뜨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 어떤 사람도 아직 품어주지 못한 것을 바다가 품어준다. 젠킨스는 마치 대서양 자체가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이 장면을 촬영한다. 이미 일곱, 여덟 살의 나이에 최대한 공간을 적게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버린 이 소년을 부드럽게 안아주듯이. 수면 위 달빛이 아이의 피부를 푸르게 물들일 때, 우리는 그 부드러움이 차라리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어떤 광경을 목격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본 적이 언제였는가? 구해지거나, 고쳐지거나,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의 의지보다 더 큰 무언가에 의해 받쳐지는 경험을.

그리고 케빈이 있다. 친구이자, 연인이자, 분노 속에서만 들어왔던 언어인 ‘접촉’을 마치 처음 가르쳐주듯 한밤의 해변에서 샤이론을 어루만지는 단 한 사람. 등 뒤로 파도가 움직인다. 너무나 고요해서 모래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것은 카타르시스를 위해 연출된 성장 서사의 한 장면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표적 외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한 소년의 순간이다.

문라이트는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렇다. 당신도 한때는 부드러웠다고. 세상이 당신을 닳게 하기 전에, 갑옷을 두르기 전에, 연기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당신은 한때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은 당신을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을 진짜로 만들었다.

침묵에 우리가 답하는 것

A tranquil twilight scene with a lighthouse reflecting on calm ocean waters, framed by a dock.Photo by Denis Yudin on Pexels

이런 영화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분석도, 박수도 아닌, ‘알아봄’으로 답해야 한다. 불편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종류의 알아봄. 화면 속 무언가가, 당신이 아주 잘 숨겼다고 생각했던 내면의 무언가를 정확히 찾아내는 바람에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그런 알아봄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연기하는 역할들을 떠올림으로써 답한다. 당신이 연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순간을 생각해보라. 무대 위도, 학예회도 아닌, 당신의 부엌, 당신의 차,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말하고, 웃기지 않은 일에 웃고, 다른 누군가의 편안함을 위해 당신이 조립해 낸 자신의 모습에 동의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던 그 순간을. 우리 대부분은 그 시작의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층층이 일어난 일이라, 마치 너무 서서히 덧칠해져 벽의 원래 색을 잊어버리게 된 페인트와 같다.

영화의 세 번째 챕터에서 샤이론은 ‘블랙’이 되어 있다. 근육질 몸에, 금니를 끼우고, 한때 자신을 물속에서 안아주었던 아버지 같던 그 남자처럼 마약상이 되어 있다. 그는 번쩍이는 차를 몰고 애틀랜타를 누빈다.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의미에서, 타인이 생각하는 ‘강인함’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알아본다. 우리 모두 자신만의 갑옷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것은 정중함일지도 모른다. 혹은 유능함, 유머, 침묵, 또는 통제력일 수도 있다. 어떤 재료를 선택했든, 우리가 그것을 만든 이유는 샤이론과 같다. 어딘가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진짜 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이 인물을 이해한다’가 아니다. ‘내가 이 인물이다’이다. 규모는 다르고, 다른 상황의 옷을 입고 있지만, 같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틀려서가 아니라, 안전하지 않아서 포기해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는 깊어진다. 문라이트는 우리가 편안한 연민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안전한 거리에서 우리가 현명하거나 동정심 많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 작은 부엌에서 마주 앉은 두 성인 남자, 샤이론과 케빈 사이의 침묵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그저 이렇게 묻는다. 이 방에 머무를 수 있는가? 원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 온 무언가를 원하는 그 불편함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가?

의미들이 맞닿는 곳

The word WHERE in bold wooden letters on a vibrant pink textured background, offering copyspace.Photo by Ann H on Pexels

문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답하는 것 사이의 통합은 깔끔한 결말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연기하는 모습과 그 연기가 무너질 때의 본모습 사이, 그 어지러운 간극 속에서 일어난다.

젠킨스는 대부분의 이야기꾼들이 놓치는 침묵의 어떤 속성을 이해했다. 이 영화에서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존재다. 샤이론은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어깨의 각도, 다른 무엇보다 위험을 먼저 좇는 시선, 그리고 관심이 곧 해악의 전조임을 배운 사람 특유의 고요함으로 소통한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터져버릴 듯 가득 차 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의 뜻을 안다. 우리 모두 언어로는 도저히 감정을 담을 수 없었던 순간들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와 가장 직접적으로 만난다. 구체적인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그 구체성도 지극히 중요하지만), 정체성이란 목적지가 아니라는 그 이해 때문이다. 우리는 주소지에 도착하듯 자기 자신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맴돌고, 지나치고, 정교한 우회로를 만든다. 그러다 때로, 운이 좋거나 용감하거나 혹은 절박하다면, 과거의 누군가가 우리를 보며 ‘너는 누구냐, 샤이론?‘이라고 묻는 부엌 식탁에 다다르게 된다.

바로 그 질문. ‘너는 누구냐?’. ‘당신은 누구십니까?‘가 아니다. 케빈은 이력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더 근본적인 것을 묻고 있다. 샤이론에게 모든 기대, 모든 생존 전략,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 아래에 있는 자리에서 말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샤이론의 대답은, 그 단순함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그 해변에서 케빈이 자신을 만진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몸이 닿은 적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몇 년. 피하거나 견뎌냈을 뿐, 단 한 번도 원하거나, 선택하거나, 부드러웠던 적 없는 평생의 신체적 접촉.

이 대화에서 피어나는 공유된 의미는 로맨스에 관한 것이 아니다(물론 로맨스도 그 일부이지만). 그것은 자기 보호의 대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벽을 쌓고, 그 벽은 제 역할을 한다. 해악을 막아준다. 하지만 벽은 바다와, 한밤의 해변과, 턱을 감싸는 손길과, 당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또한 막아선다. 우리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생존 속에서, 때로 우리는 그 생존을 가치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에 닿는 길을 잃어버린다.

젠킨스는 마이애미에서의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문라이트를 촬영했고,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런 전기적 사실들은 영화가 관객의 내면에서 일으키는 감정적 사실보다 덜 중요하다. 영화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당신을 푸른빛 속에 데려다 놓고, 당신이 숨 쉴 수 있는지 지켜볼 뿐이다.

결국 통합은 이렇다. 문라이트는 다정함을, 다정함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배워온 사람에게 가능한 가장 용감한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고 사적인 알아챔으로, 갑옷을 입었던 순간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억으로, 누군가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봐 주는 그 부엌 식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열망으로 답한다. 의미들은 부드러움이란 우리가 성장하며 벗어던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이해 속에서 만난다. 그것은 우리가 묻어두는 것이며, 그 매장에는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저녁 속으로 우리가 가져가는 것

Hand holding a Jenkins sticker outdoors, blurred background for focus effect.Photo by RealToughCandy.com on Pexels

영화와 우리가 함께 배우는 것은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허락에 더 가깝다. 우리가 했던 가장 힘든 일이 고난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갑옷을 벗은 우리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허락.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 항상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허락.

적절한 순간에 건네진 한 번의 다정한 행위는 한 사람을 수십 년간 지탱해 줄 수 있다. 이것은 감상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의 단순하고, 거의 잔인할 정도의 셈법이다. 물속에서 소년을 안아주는 후안. 해변에서의 케빈의 손길. 30년 후 조용한 부엌에서 차려진 식사.

오늘 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둘 사이의 공기는 차마 하지 못한 모든 말들로 무겁다. 음식은 식어가고 있다.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