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유리창
자정이 지나 도시가 고요해졌다. 완벽한 정적은 아니다. 도시는 결코 진정한 침묵에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차량은 이따금 지나가는 택시뿐일 정도로 뜸해졌고, 대화는 닫힌 문 뒤로 물러났으며, 남은 것은 흡사 숨을 죽인 듯한 정적이다. 이 고요함 속에서, 길모퉁이의 식당 하나가 길 잃은 나그네를 위해 내건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는 1942년 이 장면을 그려 『밤을 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이라 이름 붙였다.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무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매(hawk)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고독한 사냥꾼이다. 하지만 이들은 밤의 매, 어둠 속을 거닐며 남들이 잠든 시간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존재들이다. 네 명의 인물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가까이 앉아 있지만 온전히 닿아 있지는 않은 한 남자와 여자, 우리에게 등을 보인 또 다른 남자, 그리고 유일하게 분명한 목적을 가진 듯 보이는 흰 옷의 점원. 실내의 빛은 그림자를 납작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형광등 특유의 그 황록색 빛으로 거의 공격적일 만큼 밝다.
창문을 보라. 창은 길모퉁이를 따라 하나의 거대한 유리판으로 둥글게 이어져 있고, 눈에 보이는 문은 없다. 이 디테일은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든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텅 빈 보도를 지나는 누구에게나 모든 각도에서 보이는, 마치 표본처럼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고, 어쩌면 그저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길 건너 건물들은 어두운 창문, 무표정한 얼굴들을 보여준다. 선반 위에는 금전 등록기가 놓여 있다. 커피잔들이 빛을 반사한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마음이 저려오는 풍경이다.
무엇이 세대를 거듭하여 우리를 이 그림으로 이끄는 걸까?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매일 밝고, 시끄럽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수천 개의 이미지를 스크롤한다. 하지만 호퍼의 식당은 우리를 멈춰 세운다.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거리의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와 대비되는 실내의 온기, 어떤 친밀함도 공유하지 않는 듯한 육체의 근접성, 그리고 하루와 다음 날 사이에 매달린 시간 그 자체. 우리는 이 공간을 알아본다. 호퍼가 영감을 얻었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특정 모퉁이에 가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그런 장소에 가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잠들었어야 할 시간에 형광등 불빛 아래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아주 잠시나마,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던 낯선 이들 사이에 있었던 적이 있다.
침묵이 품고 있는 것
이 그림 앞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더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무엇이 이 네 사람을 이 특정 시간, 이 특정 모퉁이로 데려왔을까? 남녀는 공연이나 저녁 식사 같은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길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몸짓은 저녁을 시작하게 했던 불꽃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미 다 타버렸음을 암시한다. 고독한 남자는 달리 갈 곳이 없는 사람의 자세로 커피 잔에 몸을 수그리고 있다. 점원은 기다림에 익숙해진 사람의 인내심을 갖고 서 있다.
호퍼는 이 그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렸다. 그림 밖의 세상은 두려움과 긴박함으로 시끄러웠던 시기다. 하지만 그림 속 어느 것도 그 갈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헤드라인이 실린 신문도, 군복도, 그 역사적 순간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표식도 없다. 대신 호퍼는 그날그날의 뉴스를 넘어 오래도록 살아남을 무언가를 우리에게 주었다. 바로 현대적인 삶의 일상적인 외로움, 도시가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동시에 고립시키는 방식이다.
수백만 인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이슥한 시간에 깨어 있는 단 한 사람, 이 특별한 무게를 짊어진 유일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것이 8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그림이 동시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기술은 변했다. 우리는 커피 잔을 응시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원적인 조건은 그대로다. 우리는 친밀함이 아닌 효율성을 위해 설계된 구조물 속에서 산다. 공간에 머무르기보다는 그저 통과한다. 이름도 모르는 이웃과 벽을 공유하며 산다. 호퍼의 그림 속 식당은 사적이지도, 그렇다고 온전한 공적 공간도 아닌, 낯선 이들이 일시적인 휴전 상태로 공존하는 그런 경계의 공간 중 하나다.
호퍼의 아내 조세핀이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 작은 사실은 한 겹의 애틋함을 더한다. 작가는 자신의 인생 동반자를 단절에 관한 장면에 배치하고, 한 남자 옆에 앉아 있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는 역할을 맡겼다. 그들은 이에 대해 이야기했을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포착하려 했는지 이해했을까? 결혼이란 것도 어쩌면 나란히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는 분리된 채로 남아 있는 것.
눈에 보이는 문이 없다는 점은 그림의 구성을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호퍼가 선택한 구도의 결과인지에 대해 논쟁해왔다. 하지만 그 효과는 명백하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갇혀 있다. 그들은 쉽게 떠날 수 없고, 우리는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유리창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얇은 막이 되고, 우리는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돕거나, 방해하거나, 함께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시간들
우리가 ‘새벽녘의 시간들(the small hours)’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정부터 동틀 녘까지의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는 다른 무게를 지닌다. 낮의 관성은 멈췄지만, 내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일종의 유예 상태로 들어선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낯선 길로 접어든다. 오래된 슬픔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날카로워진다. 수년간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억해낸다. 평소의 과업이 없는 마음은, 평소에는 울타리를 쳐 두었던 영역으로 헤매어 들어간다.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풍경을 안다. 새벽 세 시의 부엌. 어두운 방에서 빛나는 노트북 화면. 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이며 불면과 벌이는 조용한 협상. 우리는 차를 끓이거나 위스키를 따른다. 같은 문단을 세 번씩 읽는다. 창가에 서서 거리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는다.
호퍼는 이 시간들이 우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이해했다. 보여줄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쓰는 사회적 가면은 벗겨진다. 혹은, 보여줄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식당 안의 낯선 이들은 서로를 위해 연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분리된 상태 속에서 편안해져 있다. 이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일종의 정직함이다. 그들은 멋진 시간을 보내는 척하지 않는다. 억지로 대화를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각자의 내면의 날씨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이 장면에는 외로움이 있다, 그렇다. 하지만 존재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제공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반자 관계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도 있다. 점원이 거기에 있다. 커피는 뜨겁다. 불빛은 바깥의 어둠을 막아준다. 때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함께 홀로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형태의 연결일지도 모른다.
머무르는 질문
우리는 이윽고 그림을 떠난다. 우리의 삶으로, 대낮으로, 의무로, 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소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호퍼의 길모퉁이 식당에서 온 무언가가 우리와 함께한다. 심야의 공항 터미널이나, 텅 빈 도로 위 조용한 차 안이나, 모두가 잠든 후의 부엌에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득 떠오른다.
그림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와 타인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유리와 콘크리트와 형광등 불빛 속에 새겨진 현대적인 삶의 건축 양식의 일부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절망이 아니다. 인식이다.
어쩌면 호퍼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외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떻게 현존할 것인가 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분리의 불편함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밤을 새우는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머무를 장소를, 그 아래 앉을 불빛을, 손에 쥘 컵을 찾아냈다. 그들은 이 시간까지 버텨냈고, 아침까지도 버텨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그저 그 옆에 앉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허락한다면, 그 유리창 안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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