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차를 집 앞 진입로에 세웠다. 시동은 꺼져 있다. 집 안은 불이 환하고, 창문 너머로 당신 삶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보인다. 램프, 문틀, 지나가는 누군가의 그림자. 하지만 당신은 아직 열쇠를 돌리지 않았다. 아직은. 문을 열고 안으로 가져가기 전에, 어둠 속에서 한 번 더, 천천히 한 바퀴 더 돌려보아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로댕이 청동 속에 포착하여 영원히 붙잡아 둔 자세다.
그 조각상은 거친 돌 좌대 위에 앉아 있다. 오른쪽 팔꿈치는 왼쪽 무릎을 깊이 파고들고, 턱은 손등을 어찌나 세게 누르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는 듯하다. 상체는 물음표처럼 앞으로 구부러져 있다. 발가락은 마치 땅이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좌대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있다. 그의 등은 결코 이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굳어버린 노력의 풍경이다. 척추를 따라 뭉치고 뒤틀린 근육들, 불타는 무언가를 감싸 안으려는 듯 안으로 말린 넓은 어깨. 그는 돌이라도 부술 법한 몸을 가졌지만, 그 모든 힘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와 그저 함께 머무르는 데 쓰고 있다.
청동의 표면은 거칠고, 거의 동요하는 듯하다. 로댕은 결코 매끈하게 닦아내지 않았다. 빛은 고르지 않게 맺힌다. 눈은 그림자 속으로 향한 채 가려져 있다. 당신은 그의 시선과 마주칠 수 없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든, 그것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아직 이름도, 형태도, 답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저 무게만이 있을 뿐.
우리는 이 자세를 불신하도록 배워왔다. 꾸물거림, 나약함,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도록 말이다. 우리는 결정하고, 행동하고, 움직여야만 한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는 바로 이 다음 순간을 숭배한다. 돌파구, 명확함, 문을 통과하는 자신감 있는 발걸음. 그러나 로댕은 기이하게도 이 순간을 영웅적이라 칭했다. 그는 그것을 6피트 높이의 청동으로 주조해 광장에 세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이. 세상은 이것을 보아야 한다. 세상은 멈추어야 한다.
진정한 사유는 효율적이지 않다. 그것은 무겁고, 육체적이며, 느리다. 그리고 중력이 빛을 휘게 하듯, 사유는 몸을 제 주위로 휘게 한다.건너뛸 수 없는 생각, 당신의 잠과 자세와 식욕을 대가로 삼는 그런 종류의 사유는 당신 삶의 우회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다. 서두르기엔 너무 거대한 질문과 홀로 앉아, 섣부른 답을 거부하고, 내면의 무언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에 진입로에 1분 더 머무는 것, 그것은 마비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저 조각상이 기리고 있는 노동이다.
당신은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만 결정이 내려지고 그 결과가 평범한 나날들 속으로 자리 잡은 오랜 뒤에도, 몸은 이 시간을, 이 시간의 특별한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어깨의 어떤 부분이 마음이 고뇌했던 것을 짊어진다.
저 청동상은 결코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보고, 일어서기 전에 잠시 그곳에 머물러 쉴 수 있도록, 그 고투의 순간을 붙잡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