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혼에 깃든 황무지
영감

우리 영혼에 깃든 황무지

3분 소요

눈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화자인 록우드는 워더링 하이츠 안, 덧창을 내린 침대에 누워 있다. 손님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숨죽인 공간 같은 방 안에서, 그는 반쯤 꿈결인 채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의 손가락이 걸쇠를 찾는다. 걸쇠가 차가움을 전한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가 그를 마주 더듬는다. 작고 얼음처럼 창백한 손, 지난 20년간 이 창문을 두드려 온 한 아이의 손이다.

“들여보내 줘.” 목소리가 말한다. “들여보내 줘.”

이어서 록우드가 한 행동은, 이 소설이 독자로 하여금 결코 잊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 일이다. 그는 즉시 몸을 움츠리지 않는다. 정신이 아찔한 첫 순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손목을 움켜쥔다. 되잡아오는 악력을 느낀다. 그리고 공황에 빠져, 그 작은 팔을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끌어당긴다, 앞뒤로, 마침내 잡은 손이 풀릴 때까지. 그러고는 상처를 책으로 틀어막고는 먼 쪽 벽으로 몸을 밀어붙인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입은 벌어진 채, 밖에서는 어둠과 눈보라 속에서 그 목소리가 계속 흐느끼고 있다.

록우드,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다. 그는 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그는 손을 뿌리친다.

에밀리 브론테는 요크셔의 한 목사관 부엌 식탁에서 이 장면을 썼다. 밖에서는 바람이 제 나름의 주장을 펼치듯 울부짖고, 창문에서는 공동묘지가 내다보일 만큼 가까웠다. 그녀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날씨와 슬픔의 언어를,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느껴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 특별한 침묵을 배워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얼어붙은 창가에서 애원하는 유령의 목소리에 담아냈고, 어찌 된 일인지 그 목소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유리를 뚫고 우리에게 닿고 있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들리느냐가 아니다. 그 손아귀가 조여 오는 것을 느낄 때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이다.

우리 대부분의 내면에는 록우드의 어떤 모습이 존재한다. 새벽 세 시, 우리가 분명히 끝냈다고 확신했던 어떤 슬픔이나 사랑, 혹은 그리움 같은 오래된 권리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껴본 바로 그 모습 말이다. 그런 것들을 밖에 두기 위해 우리가 신중하게 쌓아 올린 삶이라는 유리에 차가운 얼굴을 바싹 갖다 댄 채로. 우리가 잔인해서 손을 뿌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우리가 그 부재를 중심으로 우리 자신을 재편했기 때문일 뿐이며, 창문을 여는 것은 모든 것을 다시 재배열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브론테는 록우드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소설 속 누구도 딱히 심판하지 않는데, 바로 이 점이 그녀의 시대를 불안하게 했고 여전히 우리 시대를 뒤흔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저 밖의 목소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어떤 인연은 거리나 죽음, 혹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결정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인연들은 황야가 그러하듯 끈질기게 이어진다. 우리의 기호에는 무관심한 채, 우리의 설명보다 더 오래된 존재로.

문 두드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그 이름을 모를 수도 있다. 괜찮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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