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어둠 속 방 안에 홀로 선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밖에서는 엘시노어 궁정이 축제와 음모를 이어가고 있지만, 햄릿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홀로 서 있다. 안으로 겨눠야 할지 밖으로 겨눠야 할지 정하지 못한 칼날처럼, 하나의 질문을 손에 쥔 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사라질 것인가.”
셰익스피어가 그 말을 쓴 지 4세기가 흘렀지만, 그 말들은 여전히 겨울밤의 입김처럼 허공에 머문다. 여러 세대가 그렇게 읽어왔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살을 고민하는 남자의 독백이 아니다. 이것은 그보다 더 거대하고 끔찍한 무언가다. 이것은 의식 그 자체가 그것이 가져오는 고통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묻는 한 인간의 질문이다.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알며, 세상의 본모습을 보는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그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이 나은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는 삼촌이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안다. 그는 어머니가 고의적인 외면으로 공모했음을 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궁정이 독과 거짓으로 세워졌음을 안다. 그리고 이 모든 앎을 홀로 짊어지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며, 그 선택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망령은 복수를 요구했다. 그의 양심은 신중하라 속삭인다. 세상은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서서, 서성이고, 생각하고, 질문한다. 그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명확히 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행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은 또한 하나의 죽음이다. 다른 버전의 내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한 버전의 나를 닫는 행위. 죽이는 행위는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은 순수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벽은 차갑다.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성찰
우리는 인정하는 것보다 더 자주 우리 자신의 성벽 위에 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모든 것을 바꿀 결정. 관계를 산산조각 낼 진실. 넘어야만 하는 줄 알면서도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문턱. 우리는 스스로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정보가 더 필요하다고, 더 명확한 신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 선택이 우리를 만들어낼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뛰어들고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공식이나 지혜를 제시하지 않는다. 햄릿의 이야기는 파멸로 끝나고, 무대는 시체들로 가득하며, 망설임의 대가가 끔찍할 만큼 명확해진다. 하지만 섣부른 행동의 대가 또한 그만큼 컸을 것이다. 안전한 선택이란 없다. 우리가 준비되었든 아니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400년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은 지침이 아니라 유대감이다. 다른 누군가도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 다른 누군가도 의식의 마비 상태를, 명확히 보는 것의 무게를,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해야 하는 공포를 느꼈다. 이 차가운 밤샘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멀리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사유는 도피가 되는가? 언제 지혜는 두려움이 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둠 속에 서서, 우리 자신의 칼날을 쥔 채, 어쩌면 결코 오지 않을 확신을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에만 알게 될 것이다.
횃불이 흔들린다. 미래는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