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느낌, 그 흐릿한 경계에서
영감

봄과 느낌, 그 흐릿한 경계에서

3분 소요

그는 자신만의 연못가에 서 있는 노인이다. 이제는 그 연못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백내장이 서서히 제 일을 해낸 것이다. 한때 수면을 가로지르며 좇았던 날카로운 윤곽들, 이를테면 꽃잎의 섬세한 곡선이나 물에 비친 하늘과 맞닿은 뚜렷한 경계선 같은 것들은, 이제 그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로 부드럽게 번져갔다. 그럼에도 그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베르니의 어느 오후, 빛은 늦은 시간에 으레 그렇듯 스러지고 있다. 구름은 자리를 옮겼다. 수련은 더 이상 온전한 물도, 온전한 하늘도 아닌 수면 위에 떠 있다. 그 사이의 무언가.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 모네는 붓을 들어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이곳에 서서 숨 쉬는 느낌, 확실함의 경계 너머에서 세상이 떨리고 있는 그 느낌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계속해서 되돌아가는 이미지다. 날카롭고 허기진 눈으로 인상을 좇던 젊은 화가가 아니라, 흐릿해진 시력으로 수십 년간 곁을 지켜온 바로 그 연못에 여전히 나타나는 늙은 화가의 모습이다. 여전히 그곳에서 변화를 발견하고, 여전히 그것으로 충분함을 느끼는 모습. 이 시기의 거대한 캔버스들은 물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물이 된다. 그 그림 앞에 서면 주변 시야가 사라진다. 당신을 붙들어줄 수평선도, 액자 아래 단단한 땅도 없다. 오직 색 속으로 녹아드는 색, 제 그림자 속으로 접히는 빛, 깊이를 헤아리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암시되는 깊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무언가 줄어드는 것에서 상실을 보도록 배운다. 흐려지는 시력, 무뎌지는 확신, 한때 선명하게 붙들었던 경계의 흐릿함. 이런 것들은 정밀하게 살아온 삶의 실패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모네는 백내장이 온 뒤에도 연못으로 계속 돌아갔고, 그가 그곳에서 만들어낸 것은 결코 수준 낮은 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어쩌면 우리가 혼란이라 부르는 것은, 때로 세상이 우리에게,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보다 더 정직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눈이 필요한 시절도 있다. 선명한 선을 긋는 것이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다른 시절도 있다. 슬픔, 사랑, 무언가가 되어가는 기나긴 여정의 한가운데 같은 때.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일은 경계를 고집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 흐릿함과 함께 앉아 있는 것. 수련 잎과 그 그림자, 그리고 그 위의 하늘이 모두 하나로 흘러들어, 파괴하지 않고서는 분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

모네는 자신의 연못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정밀함에 대한 필요를 넘어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혼란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선이었다. 더 많은 것을 품고, 더 적게 물으며, 세상이 본래 모습 그대로, 찰나적이면서 온전하게 존재할 여지를 남겨두는 그런 시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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